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리 외방전교회 (문단 편집) == 창립과 창립정신 == 17세기에 [[포르투갈]]과 [[스페인]]은 전세계를 통하여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고, 아울려 종교적으로 [[로마]]와의 계약, 이른바 포교상의 ‘보호권’에 의하여 복음 전파 활동에 있어서도 상당한 우위권을 갖고 있었다. 당시 [[교황청]]의 포교성성(布敎聖省)은 이러한 종교상 우위권을 분쇄하기 위하여 [[프랑스]] [[선교사]]들의 포교열(布敎熱)을 이용하여 1658년 선교단체의 설립은 물론, 1659년 팔뤼(F. Pallu)와 모트(P.L. de la Motte) 두 신부를 [[주교]]로 임명한 뒤 그들을 샴(오늘의 [[태국]])으로 파견하였다. 1664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, 이 신학교는 교구 사제뿐만 아니라 선교 사제 희망자를 모든 교구로부터 모집하여 성직자로 양성한 후 아시아로 파견하였다. >1) 동인도에 [[프랑스]] [[주교]]들과 성직자들을 파견하기로 하는 계획을 구상하도록 하신 [[하느님]]의 제일 첫째 목표이며, 그 계획을 실제로 수립한 [[교황청]]의 첫째 의도는 이교인들의 회개에 있었다. 그런데 이를 실현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, 이교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뿐 아니라 그보다도 한층 더 중요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 그 정신이었다. 다름 아니라, 새로 입교한 신자들이나 그 자녀들 가운데 합당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성직에 올림으로써, [[예수 그리스도]]와 사도들이 전 교회에 걸쳐서 해 주셨던 것과 같이, 각 지방에 성직자단을 구성하고 교계제도를 설립시킨다는 원칙이었다. 그 길만이 단시일 내에 완전한 [[그리스도교]]를 형성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임을 관계자들은 잘 알았기 때문이다. (중략) 그렇게 되면 그런 나라의 교회는 외국으로부터의 원조 없이 자립적으로 해나갈 수가 있게 될 것이다. > >2) 그러므로 [[프랑스 파리|파리]]의 신학교로부터 배출된 모든 일꾼들은 그들이 일하게 될 지역에 하나의 교회를 이루기에 충분한 정도의 신자들이 생기고 그들로부터 목자들을 선발해 낼 수가 있는 단계에 이르면 즉시 성직자 양성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자기네들의 가장 큰 목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. 그리하여 방인 성직자단이 형성되고, 교회가 외국 [[선교사]]들의 존재나 협력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해 나갈 만한 단계에 이르면, 성청의 허락을 받아서 그들은 흔쾌한 마음으로 모든 설비들을 방인 사제들에게 넘겨 주고 물러나 다른 곳을 찾아가 일해야 한다. > >3) 따라서 그들이 기울여야 할 노력의 우선 순위는 다음과 같다. >'''첫째, 적합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성직자로 양성시키는 일.''' >'''둘째, 새 신자들을 적절히 돌보는 일.''' >'''셋째,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하는 일.''' >여기서 둘째보다는 첫째가, 셋째보다는 둘째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우선 순위를 절대로 뒤바꾸지 말 일이다. >---- >파리외방전교회 회칙 1장 中 이 신학교의 설립은 포교사(布敎史)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. 그것은 선교사들이 이곳 저곳을 여행하면서 포교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, 일정한 포교 지역에 종신토록 머무르면서 그곳의 언어와 풍습을 배워 포교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. 또한 선교의 우선 순위를 현지인 성직자 양성에 두었으며, 기존의 [[포르투갈]]식 선교와는 달리 정치 세력의 비호[* [[예수회]]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실태를 보면, [[건륭제]]는 측근들의 생활(과 지하 포교사업에 관련된 자금세탁)을 위해 [[팔기군]]의 토지를 빼앗고 그 외에도 불법 부동산 임대사업을 벌이던 북경 천주교당의 실태를 알고도 오히려 양성화해줬다. ~~지주를 척살하던 [[중국 공산당]]이 천주교를 싫어할만하다~~ ]에서 벗어났기에 제국주의 논란에서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.[* 초기에는 파리외방전교회도 왕에게 상당한 원조를 받아 운영했지만, 1822년 리옹에 전교회(Pontifical Society of the Propagation of the Faith)가 설립되자 이 회를 통해 선교 자금을 전액 신자들의 헌금으로 충당하였다. 물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[[순교]]가 [[병인양요]]의 한 가지 구실이 되는 등 [[제국주의]]와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니었지만, 세속 군주의 보호권과 엮인 기존 선교방식과는 확실히 달랐다.] 즉 그들은 통역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각 지역에 회장(會長)을 임명하여 포교 활동을 하고, 회장들 중 [[성직자]]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방인성직자(邦人聖職者)를 양성한다. 결국 파리외방전교회는 파견된 포교 지역에서 교회를 조직하고, 현지인(現地人) 성직자를 양성하여 그들이 교회를 운영하도록 함을 목표로 삼는다. 창립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[[아시아]]에 선교사 4천여 명이 파견되었는데 그 중 170여 명이 [[한국]]에 파견되었다. 한편 본회는 현지인 성직자 2천여 명을 양성하였는데 그 중 [[한국인]]은 100여 명에 이른다. 오랜 역사 동안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[[민족]]들과 함께 그 나라 역사에 참여했으며 선교사 170명이 [[순교]]했는데, 그 중 24명의 선교사가 한국에서 순교했고, 10명은 1984년 [[교황]] [[요한 바오로 2세]] 방한 때 [[시성]]되었다([[한국 103위 순교성인]]). 최근 50년 동안은 [[공산주의자]]들에 의해 [[중국]]에서 추방되었고(1949년 ∼ 1953년), 1970년대에는 [[베트남]], [[캄보디아]], [[라오스]] 등에서 철수해야만 했다(1975년 ∼ 1976년)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